
까르뱅은 튀지 않으면서 달라 보이는 안경을 만드는 브랜드다. 로고가 크게 박혀 있지 않다. 프레임 선도 요란하지 않다. 그런데 써보면 얼굴 인상이 분명히 바뀐다. 익숙한 형태에 작은 감각 한스푼만 얹는 방식, 그것이 이 브랜드의 문법이다. 그리고 이 브랜드의 뒷이야기는 안경보다 훨씬 드라마틱하다. 스물한 살 디자이너가 경찰을 피해 재봉사를 작업실에 숨긴 이야기, 비행기에서 낙하산을 뿌린 향수 런칭, 두 번의 파산과 두 번의 부활이 전부 한 이름 안에 들어 있다. 아이웨어의 특징에서부터 브랜드가 겪어온 이야기까지를 관통하는 단어 중 하나는 ‘작음’이라는 단어이다. 그 작음의 철학을 품고 있는 까르뱅 아이웨어에 특징을 살펴보고 이후 까르뱅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파혀쳐보자.
까르뱅 아이웨어의 디자인 문법

제품군을 보면 브랜드가 무엇을 지키려 하는지 보인다. 크게 세 가지다.
① 선을 덜 쓴다
루나(LUNA), 코코(COCO), 포레스트(FOREST), 마샬(MARSHALL)처럼 동그란 메탈 및 티타늄 프레임이 라인업의 중심에 있다. 렌즈 아래쪽 테를 없앤 하금테(윗부분은 뿔테, 아랫부분은 금속테인 디자인) 모델(피치, PEACH)도 있다. 얼굴에 얹히는 선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방향이다.
② 가볍게 만든다
가볍고 인체 친화적인 티타늄 소재의 사용 비중이 높다. 고급 플라스틱 소재인 아세테이트 뿔테 중에는 무게 15g대의 초경량 모델(바닐라, Vanilla)도 있다. 일반적인 뿔테 안경이 보통 25~30g 이상 나가는 것과 비교하면 절반 가까이 가벼운 셈이다. 안경 무게 몇 그램의 차이는 하루 열 시간 착용에서 체감이 완전히 달라진다. 콧대와 귀 뒤에 남는 자국의 양과 피로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③ 가격대를 한 칸 낮춘다
국내 라인업 가격은 대체로 18만 원에서 29만 5천 원 사이에 형성돼 있다. 유럽 명품 아이웨어 대비 한 단계 아래 구간이다. 이는 마담 까르뱅이 지켰던 태도, 즉 ‘거품을 뺀 접근 가능한 시크’와도 맞닿아 있다.
| 구분 | 특징 | 대표 모델 |
| 메탈·티타늄 라운드 | 얇은 선, 각진 얼굴을 부드럽게 정리 | LUNA, COCO, FOREST, MARSHALL |
| 클래식 티타늄 | 정제된 사각·보스턴 실루엣 | POP, FORCE, SIGMA |
| 하금테·콤비 | 렌즈 아래 선을 덜어낸 구성 | PEACH |
| 경량 아세테이트 | 15g대 초경량 뿔테 | Vanilla |
그 가격 이면에는 까르뱅 아이웨어와 대한민국 안경산업이 있다

여기서 많은 사람이 헷갈린다. 파리 컬렉션의 까르뱅과 국내 안경원에서 보는 까르뱅 아이웨어는 같은 이름을 쓰지만 운영 주체가 다르다. 패션 업계에서는 글로벌 하우스의 이름과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가져오고, 특정 지역의 우수한 기획·제조업체가 디자인과 생산을 전담하는 ‘라이선스(License)’ 방식을 흔히 사용한다.
까르뱅 아이웨어는 2014년 한국에서 런칭했다. 20년 넘게 안경 업계에 있던 전문가들이 프랑스 본사의 감성을 받아 국내 소비자와 환경에 맞춰 독자적으로 전개한 라인이다. 운영사는 대구광역시 북구 3공단로에 있는 투페이스옵티칼이다. 본사가 두 번 무너지는 동안에도, 한국의 아이웨어 라인은 자기 속도로 흔들림 없이 갈길을 갔다. 파리의 디렉터가 바뀌든 말든 대구의 공장은 계속 테를 깎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주소가 대구 북구 3공단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여기가 한국 안경 산업의 심장이기 때문이다.
한국 최초의 플라스틱 안경은 1946년 3월 대구 북구 침산동의 ‘국제셀룰로이드 공업사’에서 생산됐다. 현재 전국 안경 제조업체의 약 70%가 대구에 몰려 있다. 국내 안경테 수출의 약 60%를 담당한다. 2024년 전국 안경테 수출액은 7,297만 8천 달러였다. 이 중 63%인 4,599만 9천 달러가 대구에서 나왔다.
한국안광학산업진흥원 조사에 따르면, 타사의 브랜드를 대신 만들어주는 위탁생산(OEM) 판매 사업체 비중은 2022년 90.1%에서 2024년 79.8%로 줄었다. 반대로 자체 브랜드 판매 비중은 같은 기간 15.7%에서 20.6%로 늘었다. 정리하면 이렇다. 까르뱅 아이웨어는 프랑스 하우스의 이름과 감성, 그리고 대구의 제조 기술이 만난 결과물이다. 남의 브랜드를 대신 만들어주던 도시가 자기 이름을 걸기 시작한 산업의 흐름 위에 놓여 있는 브랜드이기도 하다.
지금의 까르뱅은 1945년 파리, 키 작은 여자가 만든 하우스에서 시작되었다

까르뱅의 시작은 의류에서 시작했다. ‘내 몸에 맞는 옷이 없다’는 불만이었다. 창업자의 본명은 카르멘 드 토마조(Carmen de Tommaso)다. 1909년 8월 31일 프랑스 샤텔로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기 이름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브랜드를 만들 때 이름을 새로 지었다. 자기 이름 ‘카르멘(Carmen)’의 앞부분과 사랑하던 이모 ‘마담 부아리방(Boyriven)’의 뒷부분을 붙였다. 그렇게 ‘까르뱅(Carven)’이 됐다.
1945년, 전쟁이 끝난 직후에 그는 샹젤리제 롱푸앵 6번지에 패션 하우스를 열었다. 당시 파리의 쿠튀리에(주문 제작 고급 맞춤복 디자이너)들은 주로 키가 크고 나이가 있는 여성을 위한 옷을 만들었다. 까르뱅은 반대로 갔다. 자기처럼 체구가 작은 여성을 위한 옷을 만들었다. 레이스, 핑크 깅엄 같은 가볍고 얇은 소재를 썼다. 파리는 그를 ‘가장 작은 대(大) 쿠튀리에’라고 불렀다.
그는 프레타포르테(사서 바로 입을 수 있는 기성복) 라인을 가장 먼저 시작한 선구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맞춤복만 만들던 시대에 대중적인 접근을 밀어붙인 셈이다. 이후 행보도 왕성했다. 1947년 수영복과 스키 컬렉션, 1949년 아프리카와 타히티 직물 도입, 1968년 남성복 라인 런칭으로 이어졌다. 핵심은 이것이다. 까르뱅의 DNA는 ‘화려함’이 아니라 ‘비율’이다. 작은 사람에게 맞는 선을 찾는 일. 안경테라는 물건과 성격이 잘 맞을 수밖에 없는 출발점이다. 이 ‘작은’이라는 키워드로 세상에서 제일 어두웠던 시기에 또 한번의 강렬한 에피소드를 감기게 된다.
1943년 11월 17일, 재봉사를 숨긴 젊은 디자이너

이 브랜드에서 가장 덜 알려졌고, 가장 무게가 있는 이야기다. 하우스를 정식으로 세우기 전인 1941년, 까르뱅은 파리 오페라 극장 인근에 첫 부티크를 열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스물한 살이었다. 그는 앙리 모이즈 브리시아네르(Henry Moise Bricianer)라는 재봉사를 고용했다. 루마니아 출신 유대인이었다. 반유대 법령 때문에 자기 가게를 접어야 했던 사람이다. 그는 아내와 다섯 아이와 함께 부티크 근처에 살고 있었다.
1943년 11월 17일, 경찰관 두 명이 브리시아네르 가족을 찾아왔다. 체포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이틀 뒤에 검거가 예정돼 있다고 미리 알려주러 온 것이었다. 소식을 들은 마담 까르뱅은 즉시 움직였다. 앙리를 자신의 작업실에 숨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계속 일하게 했다. 아내 레지나와 두 아이 니콜, 필립은 자신의 삼촌 집으로 보냈다. 또 다른 딸 자클린은 자기 어머니 집에 맡겼다. 가족은 흩어진 채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았다.
2000년 8월, 이스라엘 야드 바셈(홀로코스트 추모 기관)은 마리루이즈 까르뱅을 ‘열방의 의인(Righteous Among the Nations)’으로 인정했다. 유대인을 구한 비유대인에게 주는 칭호다. 남은 인생도 그다웠다. 1978년 프랑스 예술문화훈장을 받았고, 2009년 100세 생일에는 레지옹 도뇌르 코망되르가 됐다. 2015년 6월 8일, 파리에서 105세로 세상을 떠났다. ‘작은 사람을 위한 브랜드’라는 문장은 마케팅 카피가 아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이 만든 브랜드다.
낙하산 수백 개, 그리고 두 번의 죽음

까르뱅이라는 이름은 조용한 브랜드처럼 보인다. 역사는 전혀 조용하지 않다.
1946년, 파리 상공에 향수를 뿌리다
창립 이듬해인 1946년, 하우스는 첫 향수 ‘마 그리프(Ma Griffe)’를 내놨다. ‘나의 서명’이라는 뜻이다. 조향사는 장 카를(Jean Carles)이었다. 런칭 방식이 문제였다. 비행기에서 초록색과 흰색 낙하산 수백 개를 파리 시내 상공에 뿌렸다. 낙하산마다 향수 샘플이 매달려 있었다. 며칠 동안 오페라 극장에도, 자선 무도회에도, 도빌과 몬테카를로의 사교 행사장에도 같은 향이 떠다녔다. 지금 기준으로도 과감한 런칭이다. 이때 정한 초록과 흰색은 지금까지 브랜드의 상징색으로 남아 있다. 전성기의 고객 명단도 화려하다. 샹송 가수 에디트 피아프가 이 하우스의 옷을 입었다. 1970년대에는 에어프랑스 승무원 유니폼을 만들었다.
2014년, 첫 번째 추락
2008년, 라이선시(상표권 사용 계약을 맺은 파트너 기업)였던 앙리 세바운이 본사를 인수했다. 그는 지방시 출신 디자이너 기욤 앙리(Guillaume Henry)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총괄 수석 디자이너)로 앉혔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오래된 오뜨꾸뛰르(최고급 맞춤복) 하우스가 젊은 세대가 열광하는 컨템포러리 브랜드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2014년, 기욤 앙리가 떠났다. 브랜드는 급격히 무너졌다. 2017년 연매출은 2천만 유로였다. 2014년의 절반 수준이다.
2018년, 법정으로 간 하우스
결정타는 생산이었다. 2018 봄여름 컬렉션의 생산이 크게 지연됐다. 오더가 줄줄이 취소됐다. 2018년 5월 23일, 까르뱅은 파리 상사법원에 회생 절차를 신청했다. 당시 직원은 100명이었다. 8월에는 런던 켄싱턴의 매장이 문을 닫았고, 10월에는 청산 직전까지 몰렸다. 73년 된 하우스가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2023년, 두 번째 부활
브랜드를 사들인 곳은 중국 프리미엄 브랜드 아이시클(Icicle)이었다. ICCF(Icicle Carven China France)라는 회사가 세워졌다. 2023년 2월, 까르뱅은 영국 출신 디자이너 루이스 트로터(Louise Trotter)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선임했다. 라코스테와 조셉을 거친 인물이다. 그해 9월, 까르뱅은 파리 패션위크 런웨이에 복귀했다. 2018년 3월 이후 5년 만이었다. 반전은 또 있었다. 트로터는 약 1년여 만에 케링 그룹의 보테가 베네타로 떠났다. 2024년 12월에 공식 발표된 일이다. 이런 우여곡절 속에서는 브랜드는 아직도 자신의 작은 디테일의 미학을 이어가고 있다.
익숙함에 감각을 더한다는 것
가장 어려운 선택은 튀는 선택이 아니다. 튀지 않으면서 달라 보이는 선택이다. 까르뱅은 80년 동안 그 줄타기를 해온 이름이다. 창업자는 자기 몸에 맞는 비율을 찾다가 하우스를 세웠다. 그 하우스는 두 번 무너지고 두 번 일어섰다. 한국에서는 대구의 제조 기술을 만나 또 다른 계보를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덧붙인다. 얇은 프레임을 골랐다면, 승부는 절반만 끝난 것이다. 선이 얇을수록 렌즈의 두께와 반사가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프레임의 감각을 끝까지 살리고 싶다면 렌즈 설계와 코팅도 같은 기준으로 고르는 편이 좋다. 자이스의 개인 맞춤 설계 렌즈와 반사 방지 코팅이 그 지점에서 작동한다. 좋은 테를 고르는 일과 좋은 렌즈를 고르는 일은 결국 같은 질문이다. 나에게 맞는 비율이 무엇인가.
<출처자료>
Yad Vashem, ‘Marie Louise Carven — The Righteous Among the Nations’
Wikipedia, ‘Marie-Louise Carven’ / ‘Louise Trotter’
WWD, ‘Madame Carven Timeline’, ‘Carven Hires Louise Trotter as New Creative Director’
Reuters, ‘Carven, Piaf dresser in its heyday, seeks bankruptcy protection’ (2018. 5. 23)
The Perfume Society, ‘Carven’
Carven Parfums 공식 사이트, ‘The Brand’
Business of Fashion, ‘Carven Names Louise Trotter Its Creative Director’
FashionNetwork, ‘French label Carven on the verge of liquidation’ (2018. 9. 26)
Drapers, ‘Carven’s UK arm to be wound down’
CARVEN EYEWEAR 공식 사이트(carven.co.kr) ABOUT
매일신문, ‘대구서 최초 시작한 안경산업, 위탁생산→자체 브랜드 판매로 변화 중’ (2025. 3. 11) / 한국안광학산업진흥원 안광학산업 통계지표조사
이코노미스트, ‘젠몬·블펀이 연 K아이웨어 전성시대, 이젠 대구가 키운다’

